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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코의 농구/SS

홍빙 - 시험


※ 아마도 미국 고등학생 홍빙




0.
남자에게 고백을 받았다.
십 몇 년 인생동안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는 상황이라 물론 당황스러웠지만 미국이니 그러려니 하고 나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이 일을 한동안 잊고 있었다. 딱히 내게 있어서 중요한 일은 아니었고, 그 이후로 동성에게 고백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왜 지금 와서 하느냐면, 조금 전에 타츠야가 남자에게 고백 받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거절하고 돌아오는 모습을 한참 쳐다보고 있으니 타츠야는 조금 쑥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
“아니, 미안. 갑자기 나도 예전에 동성에게 고백 받은 것이 생각나서.”
“슈도?”
“응. 뭐라더라, 운동하는 모습에 반했다나.”
놀란 듯,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쳐다보는 타츠야에게 그때의 일을 말해줬다. 난 그런 취향이 아니라서, 거절했어. 하고.
“흐음… 기분 나빴다거나 그러진 않아?”
“딱히?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남의 취향에 대해 뭐라 할 생각은 없고.”
그렇구나. 미적지근한 대꾸를 하며 타츠야는 골대에 공을 던졌다. 언제 봐도 깔끔하고 아름다운 슛이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타츠야라면,”
“응?”
“아니, 가끔 생각하는 건데 타츠야 널 보면 남자도 괜찮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긴 해.”
내 말에 타츠야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고서야 이건 타츠야에게 실례되는 말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괜한 말을 했네. 이럴 때는 빠르게 사과를 하는 편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 미안. 이 말은 네게 실례겠지. 내가 생각이 짧았어.”
“아니, 그건 괜찮아.”
근처 코트에서 농구공이 굴러왔다. 이쪽으로 보내달라는 요청에 대충 던져주고 타츠야에게 몸을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그동안 말이 없던 타츠야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에, 내가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먼저 타츠야가 입을 열었다.
“슈.”
“어… 어?”
“그럼 시험해볼래?”
“뭘?”
잠깐,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해 되물었다. 시험해본다니? 무엇을?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던가.
“슈가, 남자도 좋아할 수 있는지.”
예쁘게 휘는 눈꼬리를 보면서, 나는 그 말을 거절할 생각조차 잊었다.

1.
“보통 사귄다면 뭘 하지?”
누가 봐도 장난이라 생각될만한 그 제안을 OK한지 이틀. 우리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음, 보통… 우리 나잇대라면 등하교를 같이 한다던가?”
“그럼 내일부터는 아침에 일찍 만나서 같이 학교에 가자.”
분위기에 휩쓸린 감도 없잖아 있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연인놀이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등하교를 하고, 점심식사를 같이 했다. 처음 며칠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타츠야와 있는 시간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수록, 서로의 시간을 상대방에게 맞출수록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다.
“슈! 좋은 아침.”
“타츠야 너도, 좋은 아침이야.”
나란히 걷는 이 길이 날이 갈수록 무언가 불편해져갔다. 싫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조금 더 무언가 다른 느낌으로. 나누는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도록 필사적이 되어간다. 언제부턴가 나는 타츠야와의 침묵을 견딜 수가 없다.
“슈, 듣고 있어?”
“아니, 미안. 잠시 다른 생각 중이었어. 그래서, 무슨 이야기 중이었더라?”
“정말…, 오늘 학교 끝나고 같이 농구화를 사러 가자고 했잖아.”
“아, 그랬었지. 봐둔 브랜드는 있어?”
“딱히 없는데. 쇼핑센터에 가서 같이 죽 구경하고 다니자.”
데이트도 할 겸. 어때? 타츠야가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타츠야는 무슨 생각으로 이것을 제안한 것일까. 도저히 그 잿빛 눈동자 속의 생각을 읽을 길이 없다.

2.
학교가 끝나고 타츠야와 함께 버스를 타고 쇼핑센터로 향했다. 거대한 쇼핑센터 건물 1층에는 작게 분수대가 있고, 양 옆으로 옷가게, 향수가게, 여러 가지 물건들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있었다. 우리는 1층부터 스포츠매장을 돌아다녔다.
“이 신발은 어때?”
“내 취향이 아닌걸. 난 좀 더… 아, 저런 디자인이 좋아.”
“너무 투박하지 않아?”
“전혀. 일단 신어볼게.”
신발을 신어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관심이 가는 가게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조금 지쳤을 때 슬러시를 하나씩 사들고 푸드코트에 앉았다. 어느 샌가 우리의 한 손에는 종이가방이 하나씩 들려있었다.
“아, 오늘 즐거웠다.”
“아직 오늘은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래도 이제 살 건 다 샀으니까 돌아가야 하잖아.”
타츠야의 말에 헤어지기 아쉽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어색한 웃음만 흘리며 슬러시를 한 모금 마시다가, 그렇긴 하지. 하고 긍정하자 타츠야는 아쉽다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했다. 나는 의자에 놓인 타츠야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우리는 말없이 한동안 손을 잡고 앉아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3.
집으로 돌아오는 길. 타츠야와 헤어지고 혼자 길을 걷다가 골목에서 우연히 누군가를 보았다.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눈길이 간 것은 그 두 사람이 격렬하게 입술을 부딪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아, 길거리에서 라이브로 생생하게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지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집에 들어와서 자꾸 그 장면이 생각이 났다. 사귄다면, 남자도 가능하다고 했던 것에 나와 타츠야도 그런 것을 한다는 게 포함되는 것일까.
괜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 상상만으로도 타츠야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저녁식사를 하면서도, 과제를 하면서도 호기심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정신을 차리니 컴퓨터로 자료를 찾다말고 인터넷 창에 엄한 것을 검색하고 있었다.
“이런거… 진짜 하는 건가. 그… 게이도?”
결국 니지무라 슈조의 호기심이 이겼다. 몇 번의 클릭으로 보게 된 성인 동영상에는 두 사람이 얽혀있었다.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생리적인 혐오감 같은 그런 것. 역시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창을 닫고 남은 과제를 시작했다. 과제를 하면서 생각했다. 내일 타츠야에게 우리가 시험한 것의 결론은, 나는 남자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말해야겠다고.

4.
그렇게 생각한지 몇 시간 채 되지 않아 나는 침대에서 떨어졌다. 가슴이 세차게 오르내렸다. 4Q를 풀로 뛰고 난 후처럼 심장이 두근댔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눈을 뜨기 직전을 다시 생각했다. 이건 말도 되지 않았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5.
결국 타츠야에게 말하지 못 한 채 하루가 지났다. 어쩐지 타츠야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슈? 오늘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표정이 안 좋은데.”
차마 타츠야에게 어제 밤 꿈속에서 네게 입 맞추고, 너를 만지고, 안고, 울렸다고 말 할 수가 없었다.
“그게… 시험을 못 봐서 그래.”
“아직 영어가 힘들어?”
“조금.”
다행히 이 변명은 아직까지는 먹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내가 도와줄까?”
“뭘?”
“시험공부. 우리 집 조용하니까, 같이 가서 하자.”
아니, 역효과였던 것 같다.

6.
부모님은 두 분 다 회사에 가셨다고 했다. 타츠야는 무슨 생각인걸까, 아니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거겠지.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단 둘만 한 방 안에 있으면서 아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처음 말을 꺼냈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내가 ‘타츠야라면 좋다’는 말을 꺼내기 전에 머리를 후려칠 것만 같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나는 언제부터 타츠야를 이렇게 보고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 말을 꺼내기 전부터 내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타츠야에게 이런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방 안에 마주앉아 공부를 했다. 정확히 말하면, 타츠야는 공부를 했고 나는 타츠야의 하얀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예쁘게 길쭉한 손톱이라던가, 보기 좋게 도드라진 손등의 뼈나 하얀 피부. 만지고 싶고 깨물고 싶은,
“타츠야.”
“응?”
“우리 이제 그만하자.”
“아직 시작한지 삼십분도 안 됐어, 슈.”
결국 나는 백기를 들었다. 이 시험은 네가 이겼다. 남자도 좋아할 수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적어도 남자인 네가 좋다.
“공부를 말하는 게 아니야. 시험해보자고 했던 이것.”
“연인놀이?”
“응. 그거. 아무리 생각해도 더는 아닌 것 같아.”
내 말에 타츠야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역시 남자는 안 되는 것 같아?”
“…아니.”
나는 잠시 숨을 삼켰다. 네게 말하면 너는 어떤 반응을 할까 두려웠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야.”
타츠야는 눈을 크게 뜨더니 무언가 물으려는 듯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그러나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대신에, 그 모습을 한참 보고 있던 내가 입을 열었다.
“네가 좋아, 타츠야. 남자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네가 좋아. 미안해, 더 이상은 시험해 보는 게 아니게 될 것 같아.”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너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널 좋아해, 타츠야. 진심으로.”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억겁의 시간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너는 고개를 숙였다가, 조금 후 단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입술 사이로 나오는 말에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00.
“히무로, 네가 좋아. 우리 사귀지 않겠어?”
몇 번째일까. 남자에게 고백 받는 것은. 미국에 있으면서 내 외모나 운동실력 등을 이유로 여러번 사귀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마다 내 대답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미안해.”
물론, 최근에는 이유가 하나 더 붙기는 했지만.
“난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아쉬운 표정을 짓던 상대방을 뒤로 하고 떨어져 있던 공을 주워 스트바스 코트로 걸어갔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네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다 본 것일까? 괜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역겹다? 이상하다?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을까.
사랑하는 슈.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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